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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나는 늘 무언가를 재현하고 묘사하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 형태가 분별되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있었다.

이환희
회화작가

나는 늘 무언가를 재현하고
묘사하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
형태가 분별되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있었다.
이환희
회화작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며, 어디로 가고 있나요?” 라는 질문에 막힘없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환희 작가는 인터뷰 일정이 잡힌 이후, 감정이 배제된 딱딱한 어투로 인터뷰에 관련된 서류와 함께 작업실로 오는 모든 여정을 상세히 안내했다. 인쇄소와 각종 업체들이 모여있는 충무로 거리 대로변에 위치한 핑크색 벽돌 건물 2층으로 들어서니 공간을 가득 메운 빛과 곳곳에 떠다니는 단어들, 시원하게 배치된 작품과 도구들 사이 그가 우뚝 솟은 듯 단단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대화에서 나는 그가 유달리 솔직하고 명료하며 매력적인 화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고, 해야 할 말들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구분하여 말하는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험담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었고, 목표 지점에 대한 본인만의 원칙이 있었으며 그런 이유로 그의 냉소적인 여담을 듣는 것엔 쾌감이 있었다. 확고하고 날카로운 비전을 가진 젊은 작가, 이환희를 만났다.
Q1: 학창시절이 궁금하다. 어떤 아이였고, 작가가 되기까지 어떤 선택들이 있었는지.
A1: 어렸을 때부터 특정 직업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뭔가 근사하고 멋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쇼트트랙, 축구, 배드민턴 등의 운동을 많이 하며 자랐고 고등학교 때는 수영에 심취해 동영상을 찾아 가며 독학으로 파고들었다.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컸지만 입시 만큼은 부모님의 태도가 완강 하셨기 때문에 준비를 해야 했고 당시 취미로 찍었던 사진을 모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지원했다. 합격은 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그렇게 정해진 것 없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수영을 하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미켈란젤로의 일대기가 지금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 책으로 조각이라는 분야에 큰 흥미를 느꼈고 곧바로 조소 입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미대 입시 과정을 거쳐 대학에 입학할 즈음엔 이미 구상 조각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었고 여러가지 계기로 그 시기에 회화 작업을 시작했다. 학부 시절 학교에서도 매체의 구분없이 작업하는 것이 자유로운 분위기였기에 1학년때부터 작업을 정말 많이 했고 그 모든 것들이 쌓여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Q2: 평소 본인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방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지.
A2: 어렸을 때부터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의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냉소주의가 몸에 배게 되었다. 말하기 방식 역시 냉소적인 편이고 비꼬는 것을 좋아한다. (웃음)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하다 보니 나는 모든 일들을 스포츠적으로 접근하는 지점이 있다. 도전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즐긴다.
Q3: 작업의 영감을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하다.
A3: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읽으며 20대를 보냈다. 30대가 되기 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시작 이후 매일 일정 분량을 지켜가며 1500페이지를 완독했다. 당시 작업적으로, 체력적으로 지쳐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 ‘나도 이렇게 한 단위를 응축시킨, 모든 것을 갈아 넣은 작업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이 성취욕을 자극했고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다.
Gambit (September 9 - 27, 2017 at Sophis Gallery)
Q4: Gambit 작업에서 2차원적 요소들과 3차원적 요소들을 본인의 언어로 넘나드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작업을 할 때 본인의 주관이 어떤 식으로 반영된다고 생각하는지.
A4: 나는 늘 무언가를 재현하고 묘사하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 형태가 분별되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캔버스 평면을 기반으로 이미지를 체계화하는 방식으로 작업했고, 그렇게 정립된 회화 언어가 조형 언어에 있어 나의 모국어가 되었다. 그렇게 3년 정도 회화로 작업을 지속했는데, 이후 특정 상황에서 회화적 조건에 맞아떨어지지 않거나 소실되는 영역들이 돌출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기들이나 선생님으로부터 조각의 기술적 측면(캐스팅과 실리콘, FRP 등 재료학적 요소)을 배워 나갔고 두 가지 작업방식을 2-3년정도 병행했다. 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간섭하며 현재의 작업 방식에 이르렀다.
이름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감이다. 좋은 단어를 골라낼 때의 감각과 조형적 완성을 찾아가는 태도에는 비슷한 지점이 있다.
Q5: 작업에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봤는데, 작업과 제목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이야기해 달라.
A5: 밴드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는데, 늘 음악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밴드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가치관, 음악관, 활동 방향, 상업성, 감각 들이 이름에 전부 집대성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부시절 친구들과 가상의 밴드를 만들어 이름을 짓고 페이스북 페이지에 티셔츠를 판매하기도 했다. (물론 음악은 하지 않았다.)

초기 작업에서는 작업 안에 문장이나 단어가 많이 들어갔다. 그 단어의 의미를 밝히려는 의도가 아닌 일종의 극복 훈련이었는데, 그림에 문자언어를 얹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작업이 제대로 읽힐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나의 근본적 목적은 근사한 조형의 완성에 있었지만 스스로의 작업에 핸디캡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극복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든 챌린지에 매번 받는 질문이 피로해져 그 게임은 그만두었다. 이후 작업에서는 의미화 작용을 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제외시키고 제목에만 적용했다.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어감이 좋은 단어들을 저장해 두곤 하는데, 작업에 따라 시작하기도 전에 이름을 먼저 주고 맞춰서 작업하는 경우도 있고 스케치 단계에서 혹은 완성 후에 리스트에서 이름을 찾아주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이름을 먼저 주는 형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이름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감이다. 좋은 단어를 골라낼 때의 감각과 조형적 완성을 찾아가는 태도에는 비슷한 지점이 있다. 작업할 때 조형적으로 근사한 작업을 만들고 싶은 것과 단어를 고를 때 의미보다는 어감을 중요시하는 지점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National Guard, 2016, Oil on canvas, 180x200cm
Morbid Sense of Humor, 2016, Pencil, marker, oil on canvas, 193.5x230cm
나는 미술을 스포츠처럼 대한다. 스스로를 조형예술가로 정의하므로,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조형적 완결이다.
Q6: 2016년 Weekend에서의 개인전에서부터 Rules, Argument, 이후 작업에 이르기까지 물성과 질감, 색채 대한 여러가지 시도나 실험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궁금하다.
A6: 나는 미술을 스포츠처럼 대한다. 스스로를 조형예술가로 정의하므로,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조형적 완결이다. 나는 시도나 실험을 한다기 보다는 모국어인 회화 언어로 잡을 수 없는 돌출된 뉘앙스들을 캐치하기 위해 정당한 방법을 찾는 것 뿐이다. 현시점을 사는 작가들은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험하는 데에 있어 변증법적 실험과 극복의 단계를 반복한 역사적 지점을 지나, 모든 전선을 취사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매체적 실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그 물성이 어울려서 쓴 것 뿐이다. 나는 골을 넣고 싶은 것이지, 게임의 룰을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니다.
(Left) Mural Pattern, 2018, Colored pencil, oil on canvas, 193x255cm
(Center-top) Excerpt No.1 , 2018, Pencil, oil on canvas, 35x193cm
(Center-bottom) Excerpt No.2 , 2018, Pencil, oil on canvas, 35x193cm
(Center-right) Thirty Years Old Dora, 2018, Alkyd, pencil, colored pencil, oil on canvas, 70x60cm
(Right) HXRRC, 2018, Pencil, oil on canvas, 24x19cm
A Deadly Kino, 2018, Alkyd, pencil, colored pencil, oil on canvas, 193x255cm
Q7: 작업의 동기나 영감 등을 작업을 통해 완결로 조율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A7: 감, 표면의 완성. 이것이 전해지느냐는 성공과 실패의 문제지만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본인이 아는 지점까지 가는 것이다. 보통 사전의 계획을 고수해야 하는 작업과 스트로크 단위로 바뀌어 나가는 화면에 지속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작업, 이렇게 크게 두 가지(섞이는 것도 있지만)로 나뉘는데 어느 경우에도 완성된 작업에는 ‘완성된 때깔’이 있다.
Q8: 작업의 힘든 점은 무엇인지.
A8: 성격이 급하다 보니 과정에서 만나는 못생김을 견디지 못한다. 이 그림같은 경우도 지금은 못생겼지만 곧 괜찮아질 것이다. (웃음) 유화의 경우 말라야 올릴 수 있는 특성 때문에 늘 기다려야 한다. 그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인 작가들이 있는데 나는 작업 과정 자체를 즐기지는 않는다. 나에게 작업의 기쁨이라면 완성된 순간의 희열과, 과정에서의 기대감 같은 것들이다.
Q9: 작업에 있어 바라는 점이 있다면.
A9: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씩 쌓여가는 완성을 보는 것이고, 이것들이 온전하고 가감없이 보여 지길, 그리고 조형적인 근사함을 전달하길 바란다.
Q10: 최근 가장 관심있게 찾거나, 읽거나 듣고 보는 무언가가 있는지.
A10: 강아지를 좋아해서 유튜브를 많이 찾아본다. (웃음) 최근엔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책과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두꺼운 타격감의 연주를 즐겨 듣는다.
Q11: 2020 현재의 고민은 무엇인가.
A11: 2020년 현재라고 한다면 코로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2019년부터 시장의 모멘텀을 잃은 느낌이다. 네트워크의 기능이 축소되고 실물을 보여줄 수 없는 환경이 안타깝다. 언젠가 미국 휘트니 미술관 소장품전에서 드 쿠닝의 <여인>작품을 실물로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도판으로만 보고서도 좋아했던 작품이지만, 역시 그림은 실물로 봐야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원래도 폐쇄적으로 사는 편이라 삶의 동선이 많이 바뀌진 않았지만 확실히 기회가 줄어들고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을 실감한다. 이 현상은 작가로서 뿐 아니라 시민으로서, 사람으로서 전방위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이 모든 작가들에게 쥐어준 온전한 작업의 시간 만큼 더 공들이고 완성된 작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빈도의 적정선을 찾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미술을 스포츠처럼 대한다. 스스로를 조형예술가로 정의하므로,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조형적 완결이다… 나는 골을 넣고 싶은 것이지, 게임의 룰을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니다.”
Artist : Fanhee Lee
Editor : Jeongin Kim
Photographer : Jeongin Kim
Director : Yeonjae Yoon
“당신은 어떤 사람이며, 어디로 가고 있나요?” 라는 질문에 막힘없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환희 작가는 인터뷰 일정이 잡힌 이후, 감정이 배제된 딱딱한 어투로 인터뷰에 관련된 서류와 함께 작업실로 오는 모든 여정을 상세히 안내했다. 인쇄소와 각종 업체들이 모여있는 충무로 거리 대로변에 위치한 핑크색 벽돌 건물 2층으로 들어서니 공간을 가득 메운 빛과 곳곳에 떠다니는 단어들, 시원하게 배치된 작품과 도구들 사이 그가 우뚝 솟은 듯 단단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대화에서 나는 그가 유달리 솔직하고 명료하며 매력적인 화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고, 해야 할 말들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구분하여 말하는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험담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었고, 목표 지점에 대한 본인만의 원칙이 있었으며 그런 이유로 그의 냉소적인 여담을 듣는 것엔 쾌감이 있었다. 확고하고 날카로운 비전을 가진 젊은 작가, 이환희를 만났다.
Q1: 학창시절이 궁금하다. 어떤 아이였고, 작가가 되기까지 어떤 선택들이 있었는지. A1: 어렸을 때부터 특정 직업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뭔가 근사하고 멋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쇼트트랙, 축구, 배드민턴 등의 운동을 많이 하며 자랐고 고등학교 때는 수영에 심취해 동영상을 찾아 가며 독학으로 파고들었다.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컸지만 입시 만큼은 부모님의 태도가 완강 하셨기 때문에 준비를 해야 했고 당시 취미로 찍었던 사진을 모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지원했다. 합격은 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그렇게 정해진 것 없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수영을 하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미켈란젤로의 일대기가 지금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 책으로 조각이라는 분야에 큰 흥미를 느꼈고 곧바로 조소 입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미대 입시 과정을 거쳐 대학에 입학할 즈음엔 이미 구상 조각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었고 여러가지 계기로 그 시기에 회화 작업을 시작했다. 학부 시절 학교에서도 매체의 구분없이 작업하는 것이 자유로운 분위기였기에 1학년때부터 작업을 정말 많이 했고 그 모든 것들이 쌓여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Q2: 평소 본인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방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지. A2: 어렸을 때부터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의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냉소주의가 몸에 배게 되었다. 말하기 방식 역시 냉소적인 편이고 비꼬는 것을 좋아한다. (웃음)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하다 보니 나는 모든 일들을 스포츠적으로 접근하는 지점이 있다. 도전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즐긴다. Q3: 작업의 영감을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하다. A3: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읽으며 20대를 보냈다. 30대가 되기 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시작 이후 매일 일정 분량을 지켜가며 1500페이지를 완독했다. 당시 작업적으로, 체력적으로 지쳐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 ‘나도 이렇게 한 단위를 응축시킨, 모든 것을 갈아 넣은 작업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이 성취욕을 자극했고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다. Gambit (September 9 - 27, 2017 at Sophis Gallery) Q4: Gambit 작업에서 2차원적 요소들과 3차원적 요소들을 본인의 언어로 넘나드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작업을 할 때 본인의 주관이 어떤 식으로 반영된다고 생각하는지. A4: 나는 늘 무언가를 재현하고 묘사하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 형태가 분별되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캔버스 평면을 기반으로 이미지를 체계화하는 방식으로 작업했고, 그렇게 정립된 회화 언어가 조형 언어에 있어 나의 모국어가 되었다. 그렇게 3년 정도 회화로 작업을 지속했는데, 이후 특정 상황에서 회화적 조건에 맞아떨어지지 않거나 소실되는 영역들이 돌출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기들이나 선생님으로부터 조각의 기술적 측면(캐스팅과 실리콘, FRP 등 재료학적 요소)을 배워 나갔고 두 가지 작업방식을 2-3년정도 병행했다. 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간섭하며 현재의 작업 방식에 이르렀다. 이름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감이다. 좋은 단어를 골라낼 때의 감각과 조형적 완성을 찾아가는 태도에는 비슷한 지점이 있다. Q5: 작업에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봤는데, 작업과 제목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이야기해 달라. A5: 밴드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는데, 늘 음악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밴드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가치관, 음악관, 활동 방향, 상업성, 감각 들이 이름에 전부 집대성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부시절 친구들과 가상의 밴드를 만들어 이름을 짓고 페이스북 페이지에 티셔츠를 판매하기도 했다. (물론 음악은 하지 않았다.)

초기 작업에서는 작업 안에 문장이나 단어가 많이 들어갔다. 그 단어의 의미를 밝히려는 의도가 아닌 일종의 극복 훈련이었는데, 그림에 문자언어를 얹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작업이 제대로 읽힐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나의 근본적 목적은 근사한 조형의 완성에 있었지만 스스로의 작업에 핸디캡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극복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든 챌린지에 매번 받는 질문이 피로해져 그 게임은 그만두었다. 이후 작업에서는 의미화 작용을 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제외시키고 제목에만 적용했다.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어감이 좋은 단어들을 저장해 두곤 하는데, 작업에 따라 시작하기도 전에 이름을 먼저 주고 맞춰서 작업하는 경우도 있고 스케치 단계에서 혹은 완성 후에 리스트에서 이름을 찾아주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이름을 먼저 주는 형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이름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감이다. 좋은 단어를 골라낼 때의 감각과 조형적 완성을 찾아가는 태도에는 비슷한 지점이 있다. 작업할 때 조형적으로 근사한 작업을 만들고 싶은 것과 단어를 고를 때 의미보다는 어감을 중요시하는 지점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National Guard, 2016, Oil on canvas, 180x200cm Morbid Sense of Humor, 2016, Pencil, marker, oil on canvas, 193.5x230cm 나는 미술을 스포츠처럼 대한다. 스스로를 조형예술가로 정의하므로,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조형적 완결이다. Q6: 2016년 Weekend에서의 개인전에서부터 Rules, Argument, 이후 작업에 이르기까지 물성과 질감, 색채 대한 여러가지 시도나 실험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궁금하다. A6: 나는 미술을 스포츠처럼 대한다. 스스로를 조형예술가로 정의하므로,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조형적 완결이다. 나는 시도나 실험을 한다기 보다는 모국어인 회화 언어로 잡을 수 없는 돌출된 뉘앙스들을 캐치하기 위해 정당한 방법을 찾는 것 뿐이다. 현시점을 사는 작가들은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험하는 데에 있어 변증법적 실험과 극복의 단계를 반복한 역사적 지점을 지나, 모든 전선을 취사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매체적 실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그 물성이 어울려서 쓴 것 뿐이다. 나는 골을 넣고 싶은 것이지, 게임의 룰을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니다. (Left) Mural Pattern, 2018, Colored pencil, oil on canvas, 193x255cm
(Center-top) Excerpt No.1 , 2018, Pencil, oil on canvas, 35x193cm
(Center-bottom) Excerpt No.2 , 2018, Pencil, oil on canvas, 35x193cm
(Center-right) Thirty Years Old Dora, 2018, Alkyd, pencil, colored pencil, oil on canvas, 70x60cm
(Right) HXRRC, 2018, Pencil, oil on canvas, 24x19cm
A Deadly Kino, 2018, Alkyd, pencil, colored pencil, oil on canvas, 193x255cm Q7: 작업의 동기나 영감 등을 작업을 통해 완결로 조율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A7: 감, 표면의 완성. 이것이 전해지느냐는 성공과 실패의 문제지만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본인이 아는 지점까지 가는 것이다. 보통 사전의 계획을 고수해야 하는 작업과 스트로크 단위로 바뀌어 나가는 화면에 지속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작업, 이렇게 크게 두 가지(섞이는 것도 있지만)로 나뉘는데 어느 경우에도 완성된 작업에는 ‘완성된 때깔’이 있다. Q8: 작업의 힘든 점은 무엇인지. A8: 성격이 급하다 보니 과정에서 만나는 못생김을 견디지 못한다. 이 그림같은 경우도 지금은 못생겼지만 곧 괜찮아질 것이다. (웃음) 유화의 경우 말라야 올릴 수 있는 특성 때문에 늘 기다려야 한다. 그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인 작가들이 있는데 나는 작업 과정 자체를 즐기지는 않는다. 나에게 작업의 기쁨이라면 완성된 순간의 희열과, 과정에서의 기대감 같은 것들이다. Q9: 작업에 있어 바라는 점이 있다면. A9: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씩 쌓여가는 완성을 보는 것이고, 이것들이 온전하고 가감없이 보여 지길, 그리고 조형적인 근사함을 전달하길 바란다. Q10: 최근 가장 관심있게 찾거나, 읽거나 듣고 보는 무언가가 있는지. A10: 강아지를 좋아해서 유튜브를 많이 찾아본다. (웃음) 최근엔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책과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두꺼운 타격감의 연주를 즐겨 듣는다. Q11: 2020 현재의 고민은 무엇인가. A11: 2020년 현재라고 한다면 코로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2019년부터 시장의 모멘텀을 잃은 느낌이다. 네트워크의 기능이 축소되고 실물을 보여줄 수 없는 환경이 안타깝다. 언젠가 미국 휘트니 미술관 소장품전에서 드 쿠닝의 <여인>작품을 실물로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도판으로만 보고서도 좋아했던 작품이지만, 역시 그림은 실물로 봐야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원래도 폐쇄적으로 사는 편이라 삶의 동선이 많이 바뀌진 않았지만 확실히 기회가 줄어들고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을 실감한다. 이 현상은 작가로서 뿐 아니라 시민으로서, 사람으로서 전방위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이 모든 작가들에게 쥐어준 온전한 작업의 시간 만큼 더 공들이고 완성된 작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빈도의 적정선을 찾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미술을 스포츠처럼 대한다. 스스로를 조형예술가로 정의하므로,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조형적 완결이다… 나는 골을 넣고 싶은 것이지, 게임의 룰을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니다.”
Artist : Fanhee Lee
Editor : Jeongin Kim
Photographer : Jeongin Kim
Director : Yeonjae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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